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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by 바하의 선율 2025. 11. 10.

나는 미즈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죽었나 살았나 어쩌면 나도 가오루코에게 기가 눌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연기’하고 있었을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엇이 정답이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당연히 살아가는 문제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굴 살리고 죽일지, 도전할지 말지, 기증할지 말지 고민하는 모든 삶의 문제가 모호하고 답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에게 항상 선택을 강요하는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선택을 강요받고 우리의 능력을 시험한다. 누구나 겪는 과정이며 피할수도 남에게 넘길 수도 없다.

 

그날의 가혹한 선택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현재의 나에게 다가온다. 좋은 싫든 우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건 세상은 돌아가고 우리는 거기에 발 맞춰 나아갈 뿐이다. 세상은 어쩌면 백지 상태라 우리 마음대로 그릴 수 있지만 그만큼 가혹한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처음 드는 생각은 ‘불쾌함’, ‘답답함’, ‘슬픔’ 등등이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감정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떠나가질 않는다. 내가 만약 그러한 상황에 놓인 다면 어떤 태도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간으로 남고 싶은가. 어떤 부모이고 어떤 사촌이고 싶은가.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 답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면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지나가고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수동적인 태도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무시하며 주어진 과제를 방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씩 침묵하기도 하고 모르체하기도 하며 스쳐지나가듯 까먹어 버리기도 한다. 마냥 그렇게만 산다면 언제나 쉽게, 쉽게 마음만은 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생물인 이상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마냥 모른체하며 살순 없다. 잠깐의 회피가 위안을 줄지도 모르지만 찰나의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사람들 속에서 우리를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듯이 세상의 문제에 제대로 대답하고 반응하고 상호작용 해야만 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럴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양 순진한 척하며 살면 안된다.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살 때 비로소 나도 있고 세상도 있다. 누구나 선택을 강요 받지는 않지만, 누구나 마음의 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질문에 답이 없는 답을 해야 하는가. 안타깝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나. 하고 생각해 본다.

 

가오루코는 아마 살인 미수죄로 체포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즈호는 당시 살아있는 상태이다. 분명한 점은 아직 ‘뇌사’ 상태라고 판명받기 이전이기에 법률적으로 미즈호는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이다. 더구나 그녀는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 문제를 법률로만 제단 한다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부는 아마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의 주요 논점은 사실 생명윤리나 장기 이식, 연명 치료와 관련한 도덕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뇌사와 사망, 장기이식과 관련한 주요 법의 허점을 지적하고 일본 사회에 부족한 제도를 정비하고 법률 개선을 촉구하는데 있다. 

 

우리는 뇌사를 마치 식물인간 그러니까 ‘아직 죽지는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사고의 과정이 뿐이다. 뇌사는 인간으로서의 기능, 사회적 동물로서 생존할 가능성의 상실이다. 그것은 일부 몸의 기능이나 생체 반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니까 미즈호는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한 당시 이미 뇌사였지만 제대로된 판정은 받지 않은 상태이고 뇌사는 생물학적 죽음은 아니었기에 가오루코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보다는 부모의 심정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딸을 사회적으로 생존하게 해 주었다.

 

미즈호는 팔을 움직이기도 하고 표정도 지을 줄 알았다. 신진대사가 활발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여야로 보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생물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존재로 비춰질수 있지 않을까.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의식이 없는 미즈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모든 사실은 알고 있음에도 계속하여 미즈호를 돌본 가오루코의 행동과 말을 보면서 이 소설의 모순된 감정이 지적된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며 불쾌함을 느낀다. 나뿐만이 아닌 소설 속 인물도 그러하다.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 안타깝고 슬프면서도 동시에 불편하고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누구도 가오루코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으며 무시하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만 모순된 감정을 느낄 뿐이다.

 

그러다 결국 그 사단이 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그녀를 공격하고 모두가 느끼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불편한 생각이 수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오루코는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어쩌면 그것이 더 인간적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해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왜 가오루코는 그렇게나 딸에게 집착했나. 왜 그렇게 애써 사람들의 생각을 부정했나. 작가가 의도한 장치 외에 그녀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성에 넘어에 있는 자신만의 신념을 보지 못한다. 어줍잖게 추측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이 역시 내가 그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있었지도 모른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결심하고 딸과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족 생활을 꿈꿨을 것이다. 

 

배우자에게 느낀 배신감과 허탈함을 그가 없는 가족을 통해 치유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남은 가족에게는 더 잘해주고 애써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사고를 당하고 꿈꿨던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를 배신했던 남편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였고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가 없다. 

 

가오루코가 생각했던건 회복이다. 딸만 돌아온다면 그래서 내 가족이 회복된다면 나를 배신했던 남편을 다시 내쫓고 나와 자녀들은 다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다시 돌리면 된다. 돌아갈수 있다고, 딸만 돌아온다면 행복한 가정의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미즈호를 정상인처럼 보이게 움직이는 일에 집착하고 자주 쇼핑을 하고 새 옷을 입히며 남들에게 또 나에게 온전한 딸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진 않았을까.

 

알수 없다. 그저 나의 망상이고 무례한 추측이다. 삶의 의미가 이렇게 아린지 미쳐 몰랐다.

 

미즈호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땠나. 이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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